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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 리뷰(현실이라는 감옥, 존엄한 인간, 머무는 중)

by 코발트웨이브 2025. 12. 11.

영화 『터미널(The Terminal)』의 포스터. 주인공 빅터 나보르스키 역의 톰 행크스가 짐가방을 들고 옆을 바라보며 서 있고, 오른쪽에 영화 제목 'The Terminal'이 붉은 글씨로 표시되어 있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터미널(The Terminal)』은 단순한 코미디도, 휴먼 드라마도 아닌, 삶과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공항이라는 밀폐된 공간 속, 국가도 없고 출국도 못하는 주인공 ‘빅터 나보르스키’는 경계에 선 채 ‘머물러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정체된 시간 속에서도 어떻게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지, 관계와 기다림, 인간적인 선의가 어떻게 한 사람을 지탱하는지를 감동적으로 그려냅니다. 『터미널』은 물리적 자유를 빼앗긴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머무르고 있나요?”

공항이라는 경계, 현실이라는 감옥

『터미널』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한 사실 이상의 깊이를 지닙니다. 크로코지아라는 가상의 나라에서 온 남자, 빅터 나보르스키는 뉴욕 JFK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출국도 입국도 할 수 없는 ‘법적 공백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공항은 물리적으로는 현대적이고 유려한 공간이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곧 ‘감옥’이자 ‘세상 밖의 세상’이 됩니다. 공항이라는 장소는 영화 내내 모순적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움직이고, 비행기들이 이륙하고 착륙하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빅터는 오직 ‘기다림’만을 허락받은 존재입니다. 그렇게 그는, 시간도, 목적지도 없이 멈춰버린 채 ‘살아내야 하는 공간’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빅터는 그 공간을 단순한 유예가 아닌 ‘삶’으로 전환합니다. 화장실에서 씻고, 식당에서 남은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며, 서서히 공항이라는 공간 안에서 자리를 잡아갑니다. 이 모순적인 배경은 우리 모두의 삶과도 닮아 있습니다. 늘 무언가를 기다리고, 어디론가 가야 하는 줄 알지만, 실상은 ‘지금 여기’에 머무는 일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걸 말이죠.

빅터 나보르스키, 존재 자체로 존엄한 인간

톰 행크스가 연기한 ‘빅터’는 어떤 대단한 말이나 행동 없이도 그 존재 자체로 존엄을 보여줍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돈도 없으며, 출신 국가도 사라진 상태에서 그는 매일을 ‘살아냅니다’. 화려하거나 영웅적인 방식이 아닌, 작은 친절과 꾸준함, 그리고 원칙을 지키는 자세로 말입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 오래전부터 존경하던 재즈 뮤지션의 사인을 받기 위해 미국에 온 빅터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고립과 불편, 모욕을 견뎌냅니다. 사람들은 점차 그를 무시하지 못하게 되고, 그의 성실함과 선한 영향력은 공항 안 곳곳에 스며듭니다. 보안 요원, 청소부, 식당 직원, 그리고 승무원 아멜리아(캐서린 제타 존스)와의 교류 역시 빅터가 단절된 공간 속에서도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그는 시스템 안에서 ‘오류’나 ‘문제’가 아닌, ‘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죠. 이 과정에서 영화는 말합니다. 인간은 단지 국가, 언어, 소속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당신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도,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존엄할 수 있다고. 바로 그것이 『터미널』이 전하는 진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 ‘머무는 중’이다

『터미널』은 단지 한 남자의 ‘공항 체류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곧 우리 모두의 인생에 대한 은유입니다. 누구나 삶의 어떤 순간에는 멈춰야 하고, 기다려야 하며, 예상하지 못한 고립을 견뎌야 하는 시기를 겪습니다. 빅터의 이야기가 감동적인 이유는, 그것이 결국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빅터는 급하게 무언가를 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사람답게’ 살아갑니다. 이 점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요즘 같은 속도 중심의 사회에서, 멈추는 것은 실패처럼 여겨지지만, 때로는 그 멈춤이야말로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시기일 수 있습니다. 결국 빅터는 공항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삶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바꾸었고, 관계를 만들어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의 여정은 조용하지만 깊고, 비극 같지만 희망이 남습니다. 『터미널』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당신이 지금 머무는 그 자리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을 듣는 우리는, 문득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